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(문단 편집) === 다른 후배들과의 관계 === 글라주노프의 보수적인 성향은 스트라빈스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.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제자였던 [[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|프로코피예프]]의 음악 연주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, 프로코피예프의 스키타이 모음곡이 한창 연주되는 중에 연주회장을 나가버린 적이 있다. 들어보면 알겠지만 스키타이 모음곡은 스트라빈스키의 [[봄의 제전]]에 버금가는 격렬함과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곡이기 때문에 글라주노프 입장에서는 상당히 듣기 불편했을 것이다. 한편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[[쇼스타코비치]]에게도 종종 '왜 그렇게 불협화음에 집착해?'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으며, 그의 첫 교향곡에서 마음이 안 드는 부분들을 다 교정하려 했다. 쇼스타코비치는 이에 따르는 척 하면서 실제 연주할 때는 자신의 원래 악보대로 밀고 가버렸다고 한다. 하지만 글라주노프가 자신과 성향이 다른 음악을 무조건 배척했던 것은 아니다. 그는 음악원 교수가 된 후 [[리하르트 바그너|바그너]]의 발퀴레의 음악을 10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끝에 드디어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. [[리하르트 슈트라우스]]의 살로메도 이런 식으로 반복해서 들은 끝에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. 다만 이 일화들은 출처가 불확실하다.[* 그가 실제로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음악에는 딱히 이들의 작법을 참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.] 글라주노프는 [[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|쇼스타코비치]]를 매우 아꼈는데, 쇼스타코비치가 19살에 완성한 [[교향곡 제1번(쇼스타코비치)|1번 교향곡]]의 초연을 자신의 1번 교향곡이 초연된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주선하기도 했다. 초연 후 이 교향곡도 글라주노프의 1번 교향곡 못지 않은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. 그래서인지 쇼스타코비치는 스승의 음악성향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평생 글라주노프를 존경했다.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의 육성 회고록 '증언'에 보면 스승의 개인적인 면모와 후덜덜한 천재성에 대해 많이 기술되어 있다. 40여분에 이르는 교향곡을 한 번 듣고 피아노로 틀리지 않고 연주했다던가, 항상 알콜에 푹 절어 있었다던가... 키가 161cm로 당시 기준으로도 다소 작은 편이었지만 몸무게가 89kg까지 나갔다고 한다. 젊은 시절 그려진 그의 초상화를 보면 호리호리한 편이었는데 술 때문에 중년 이후 상당히 후덕한 체구가 된 것. [[분류:러시아의 작곡가]][[분류:러시아의 피아니스트]][[분류:러시아의 지휘자]][[분류:1865년 출생]][[분류:1936년 사망]][[분류: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